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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서양문화

교양학과, 방송대, 방통대, 문화 등 현대의 서양문화 요점정리 6. 세계화 시대 에스파냐어 문화권의 의미와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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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세계화 시대 에스파냐어 문화권의 의미와 특성

1. 들어가며

* 세계화 : 재화와 용역뿐 아니라 자본과 금융 관련 상품이 국경을 넘어 활발히 거래되면서 전 세계가 하나의 시장 으로 통합되는 현상.

- 1982년 멕시코의 외채 위기 : 세계화가 대중의 뇌리에 각인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IMF의 구제 금융을 받았다.

- 15세기 말 이래 본격적으로 개시된 근대 유럽의 팽창은 세계화의 첫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선도국가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었고, ‘발견과 정복의 주요대상은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로 불리는 지역이었다. - 에스파냐는 가톨릭, 이슬람, 유대교의 공존과 혼종을 보여주는 흔치 않은 사례를 예증한 바 있다.

- 투우라는 야만적이고 원초적인경기, 잔혹한 식민통치의 전설,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된 종교재판소의 이단

심문과 화형식 탓에 오랫동안 에스파냐는 유럽 내의 후진적 이방인으로 치부되어 왔다.

- 카스티야, 카탈루냐, 바스크 등 에스파냐의 여러 지방은 하위민족주의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고유의 지역적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유서 깊은 원주민의 역사적 전통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초 이래 약 300년 동안 주로 에스파 냐의 식민 지배를 겪은 까닭에 이스파노아메리카이베로아메리카로 지칭되곤 한다.

- 2008년 현재 지구상에서 에스파냐어를 모국어 또는 공용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450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라티노 인구 팽창에 따라 에스파냐어 문화권은 세계화의 발신지인 미국 내부에서도 크게 확대되면 서 지난 몇 십 년간 미국의 인종 구성을 더욱 다양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 라티노 : 라틴아메리카 출신 주민. 영어식 표현으로는 히스패닉.

 

2. 이베로아메리카의 종교문화 : 가톨릭의 아성

- 중세 초부터 19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에스파냐에서 교회와 국가는 긴밀한 동맹관계를 유지 해 왔다.

-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이슬람 세력을 밀어내려는 이른바 재정복 과정(8세기 초~15세기 말), 15세기 말부터 300 년 이상 가공할 만한 위세를 떨친 종교재판소의 역할, 아메리카에서 대대적으로 전개된 예수회의 선교활동을 거쳐 19세기와 20세기의 전통주의적 가톨릭 대학의 설립 추진, 오푸스데이(Opus Dei:신의 사역)의 활동은 에스파냐의 가톨릭을 대변하는 몇 가지 흐름이었다.

- 에스파냐에는 가톨릭의 영향을 받은 지명과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 서북부 갈리시아에 있는 대표적 명소로, 중세 이래 널리 알려진 순례자의 길이 끝나는

지점이다.

*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 바르셀로나에 있는 에스파냐 가톨릭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건축물로서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했다. 건축을 시작한지 100년이 훨씬 넘었지만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가톨릭 예술 양식의 재현이자 프랑스식 합리주의의 요소를 가미한 독창적인 작품이다.

* 가톨릭식 지명 : 아메리카, 콜롬비아, 산토도밍고, 엘살바도르 베라크루스, 산타페, 콘셉시온, 아순시온 등

* 해방신학 :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영감을 받은 라틴아메리카 가톨릭 성직자들의 행동주의적 신학 사상과 현실참여 운동이었다. 1960~1980년대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대중 운동을 후원하면서 사회 정 의와 인권의 실현을 위한 푯대가 되었다.

*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 페루의 사제. 해방신학자들은 가톨릭교회의 권위주의적 계서구조와 경직된 성서 해석에

반대하면서 포괄적인 신학적 이해 속에서 성서의 주요개념을 재해석하려고 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시각을 원용해 개발도상국의 빈곤, 분배의 불평등, 양극화 문제를 신학적 의제로 삼았 고, 교회 기초공동체 운동을 전개하면서 구조적인 억압 기제를 고발하는 동시에 빈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을 도모했다. 좌파적 색채를 띠거나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단일한 형태를 유지한 것은 아니었다.

* 오순절파 : 복음주의 계열 개신교 교파. 가톨릭 아성에 맹렬히 도전한 결과 개종 또는 교파 간 이동이 뚜렷했다.

브라질과 과테말라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의 개신교 신자 증가율이 인구증가율의 5~6배에 이르렀다.

폭발적 증가는 누적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도시 빈민층의 새로운 저항일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주술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의 독특한 재현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3. 에스파냐어 문화권의 현대 정치사 : 내전과 혁명, 군부독재, 민주화 이행

에스파냐

20세기 에스파냐 역사의 분수령은 내전이었다. 한마디로 내전은 20세기 초부터 지속된 에스파냐의 고립과 침체,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절정이었다. 국왕과 더불어 대지주, 군부가 권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군사독재(1923~1931) : 농민 수탈, 노동계급은 도시의 빈곤층을 형성.

- 1931년 제2공화정 : 토지개혁, 정교분리, 군대개혁을 실행하고자 했지만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부딪혔다.

- 1936년 인민전선 정부 출범 : 그동안 억눌려 왔던 대중의 요구는 봇물이 터진 듯 분출되었다. 파업, 시위.

- 1936717. 에스파냐 군부의 실력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반란 : 노동자들의 저항에 치열한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 파시스트 국가인 이탈리아와 독일은 군수물자뿐만 아니라 병력까지 투입해 반란세력을 지원했다.

전쟁 확대를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불간섭 정책을 고수하는 가운데 결국 소련만 단독으로 인민전선정부 에게 물자를 제공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에스파냐의 내전은 바야흐로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 19393월 승리를 거둔 프랑코 : 1975년까지 에스파냐 역사상 최장기 독재정권을 유지하면서 지역 간 분열과 국제적 고립을 심화시켰다.

- 1975년 프랑코의 사망 : 에스파냐의 민주화 이행은 분열과 고립의 시대를 마감하는 계기.

에스파냐 정치권의 선택은 또 다른 정치적 분란의 최소화와 과거의 비극적 상흔에 대한 망각이었다.(망각협정). 2007역사기업법을 통과시키면서 과거사 정리 문제 해결.

라틴아메리카

- 1910년 멕시코 혁명, 1959년 쿠바 혁명, 1979년 니카라과 혁명 : 게릴라 무장투쟁의 승리였다는 공통점.

- 20세기 내내 라틴아메리카 곳곳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것은 군부 통치의 여파였다.

미국 정부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으면서 경제성장에 몰두하는 동시에 억압적인 독재체제를 유지했다.

- 아르헨티나 군부의 추악한 전쟁’(1976~1983)은 칠레의 장군 피노체트의 철권통치(1973~1990)와 더불어 가장 악명 높은 권위주의 체제로 손꼽혔다.

 

4. 에스파냐의 지역적 다양성과 지역 간 대립

- 북부가 녹색의 에스파냐라면, 중앙고원지대는 붉은 에스파냐, 남부 안달루시아는 백색의 에스파냐라고 지칭할 수 있을 만큼 에스파냐의 여러 지방은 다양한 색채를 띤다. 오랜 역사와 다양한 경험을 반영하는 징표이다.

- 남부 안달루시아 : 세비야와 그라나다를 포함하여 가장 오랫동안 이슬람의 정치적 지배와 문화적 영향 아래 놓여 있었고, 투우와 플라멩코의 본고장이다.

- 바스트 국가 : 나바라를 비롯해 에스파냐 동북부로부터 프랑스 서남부까지 걸쳐 있는 바스크인들의 지방을 일컬 으며, 독자성이 매우 강하다. 피카소의 그림으로 재탄생한 게르니카, 산페르민 축제, 특히 소몰이 축제로 잘 알려진 나바라의 팜플로나 등이 바스크 지방의 명소이다. ‘바스크 국가와 자유(ETA)'

- 카스티야 :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에스파냐 전체 면적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며 이베리아 반도의 중심부를 이룬다.

- 카탈루냐 : 오랫동안 아라곤 연합왕국의 중심지. ‘카탈란이라는 고유 언어를 사용하면서 카스티야와 숙적관계를 유지해 왔다. 바르셀로나가장 남쪽에 있는 북유럽 도시로 불릴 만큼 가장 국제적인 감각과 화려 한 면모를 갖춘 도시로서 꾸준히 일하고 검소하며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특성이 있다.

- 통합의 주도권을 쥔 카스티야 : 에스파냐 내전이 끝난 귀 프랑코의 파시스트 체제가 철저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선보이며 카탈루냐에 대한 가혹한 탄압으로 지역 간 대립과 악감정을 더욱 증폭시키고 말았다.

 

5. 정열의 스포츠, 축구와 투우

에스파냐 = 태양과 정열 = 축구와 투우

축구

- 라 리가(La Liga) : 에스파냐의 1부 리그

- 엘 클라시코 : ‘라 리가의 호적수 레알 마드리드FC 바르셀로나가 벌이는 축구 경기.

한 시즌에 최소한 두 번씩 펼쳐지는 그야말로 숙명의 라이벌전이다.

에스파냐 내전의 재연으로 인식하기까지 한다.

투우

- 목축과 농업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신에게 황소를 바치는 고대의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 에스파냐뿐만 아니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멕시코 등지에서 시성식 같은 종교의식이나 국가적 경축행사를

기념하기 위한 축제로서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 매년 봄 부활절 축제부터 10월 말까지 매주 일요일과 공휴일에 열리는 오후 5~6시 무렵에 시작된다.

- 주역 투우사 마타도르. 작살을 꽂는 단창잡이, 말을 탄 채 창으로 소를 찌르는 창잡이, 조수 등 여러 명이 한 조.

* 물레타 : 마타도르가 사용하는 붉은 천으로 감긴 막대 창.

 

6. 라틴아메리카의 두 가지 거대한 전환

(1) 첫 번째 전환 : 유럽 지향에서 전통 또는 혼성의 재발견

- 1820년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성취한 뒤 반세기 넘게 혼란기를 겪다가 1880년대에 다소 안정을 되찾은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는 서유럽과 미국을 발전 모델로 삼아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에는 특히 프랑스 문화가 유럽지향적인 라틴아메리카 엘리트층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었고,

급기야 1900년경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상파울루는 남아메리카의 파리로 탈바꿈했다.

게다가 1860년부터 1930년까지 아르헨티나에만 600만 명이 넘는 유럽인이 쇄도했다.

- 1898년 미국-에스파냐 전쟁 이후에는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커졌고, 특히 카리브 해와 중앙 아메리카는 미국의 뒷마당이 되었다.

* 호세 엔리케 로도 : 우루과이의 작가. 아리엘(1900)을 통해 미국 문화가 지닌 물질적 세속주의와 미국에 대한 열광을 경고했다. 대신 지역적 정체성의 형성과 유지를 역설하면서 라틴 문화의 반물질적·

반세속적 성향과 정신적 감수성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 호세 바스콘셀로스 : 멕시코 철학자. 멕시코 혁명이 끝난 뒤 실용적 기술을 매개로 라틴아메리카에 상당한 영향력 을 행사하려는 1920년대 미국과 영국의 지배 욕구를 경계하면서 원주민의 역사와 혼성,

즉 인종적 혼혈과 문화적 화합을 지역적 정체성의 핵심 요소로 파악했다.

 

(2) 두 번째 전환 : 세계화의 모범생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 거점으로의 변모

- 1982년 멕시코의 외채 지부유예 선언을 비롯해 국제통화기금의 긴급 지원을 받게 된 라틴아메리카의 주요

국가들은 정부규제를 출소하고 방만한 재정지출을 줄이며, 비효율적인 공기업들을 민간부문에 매각하고

외국자본에 대한 제한을 철폐하거나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국내시장을 개방하는 등 신자유주의 노선을 충실히 견지했지만 중장기적으로 볼 때 라틴아메리카의 경제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 신자유주의 정책의 모범생으로 인정받은 멕시코와 아르헨티나는 계층과 지역의 양극화라는 심각한 상황에

봉착했으며, 현재 라틴아메리카는 세계에서 빈부 격차가 가장 극심하고 도시화 수준과 국가 채무의 부담이

가장 높은 편이다.

- 199411일 북아메리카 자유무역협정(NAFTA)의 발효에 항의하면서 봉기를 일으킨 멕시코 치아파스의

사파티스타해방군이나 다른 반세계화 대중운동 세력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철회를 강력히 촉구했다.

- 특히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의 정치무대에서는 좌파의 귀환현상이 나타났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 브라질 노동자당의 룰라 다 시우바, 아르gps티나 정의당의 네스토르 키르츠 네르, 볼리비아 사회주의운동당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 니카라과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의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 등이 21세기 초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바람을 이어 갔다.

신자유주의 노선을 대폭 수정하거나 폐기하고 빈곤퇴치를 위한 부의 공평한 분배, 의료혜택의 확대, 주거문제 해결과 같은 사회정책을 강조함으로써 라틴아메리카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 거점으로 탈바꿈시켰다.

 

7. 스팽글리시 : 미국의 라틴아메리카화?

- 지난 한 세대 동안 미국 내 에스파냐어 사용 인구의 증가에 힘입어 에스파냐어 문화권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은 또 다른 관심거리이다. 아메리카대륙은 리오그란데 강을 경계로 북쪽의 앵글로색슨과 남쪽의 라틴문화권으로 구 분되어 왔지만, 최근 미국 내 인종과 언어지형이 눈에 띄게 변화하면서 이런 전통적인 구분법이 점차 무색해졌다.

- 현재 에스파냐어 사용 인구만으로도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다음의 국가를 이룰 수 있는 수준, 미국은 5의 라틴아메리카 국가인 셈이다.

- 가장 인구가 많은 캘리포니아의 경우 공식통계에 따르더라도 라티노 인구는 전 주민의 약 305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 순위 2~3위를 유지해 온 텍사스 역시 예로부터 두 가지 언어와 문화를 지닌 지역으로, 특히 텍사스 남부는 라티노 문화권을 이루어 왔다. 라티노는 텍사스 전체 인구의 32%를 차지했고, 18세 이하 연력 집단의 40%

라티노이다. 일명 젖은 등’(불법이주자)을 포함한다면 미국 내 라티노의 숫자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 치카노 : 멕시코계 미국인. 원래 20세기 초 1세대멕시코계 미국인들이 1930년대 말 갓 이주한 멕시코인을 낮춰 부르는 표현이었다. 작은 꼬마나 소년을 뜻하는 치코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스팽글리시 : 1954년 푸에르토리코의 언론인 살바도르 티오가 신문칼럼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로서,

애당초 에스파냐어의 퇴보를 상징하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표현은 어법에 맞지 않는 영어 구사를 공공연히 비판하고 라티노를 주변적 존재로 폄하하는 부정적 뉘앙스를 담게 되었다.

이런 시각에 따르면 스팽글리시는 멕시코, 푸에르토리코, 쿠바, 도미니카 출신 이주민들이 구사하는 비표준적 영어로서 미국 남부에서는 흔히 텍스-멕스라고도 불린다. 인종차별 요소를 지닌다.

- 일부 라티노 활동가들은 치카노의 경우처럼 스팽글리시를 언어적 정체성과 문화적 유산에 대한 긍정적 표지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스팽글리시는 라티노의 언어이자 정체성이며 행동양식이자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으로

재탄생했다. 그것은 또한 치카노, 뉴요리칸(뉴욕에 거주하는 푸에르토리코인), 쿠바계 미국인 등 특정 라티노 집단 을 일컫는 여러 이름과 표지들의 분파적 성격을 예방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 에스파냐어 사용 인구의 증대는 미국 내 영어 전용 정책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미국의 인종·문화적 다양성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 에스파냐어 문화권은 우리에게 제공하는 정보와 교훈은 적지 않다. 정복과 수탈, 지배와 종속의 역사를 예증했고 때로는 반발, 저항, 혼성을 통해 다양한 파장을 선보였다, 특히 대안의 부재를 설파하면서 전 세계에 획일적인

논리를 부과하려는 최근의 세계화 추세에 맞서 에스파냐어 문화권은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복합적인 삶의 모습 과 다면적인 사호 작용을 웅변해 주는 귀중한 사례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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