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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현대문학론

중문학과, 중국사, 방통대 등 중국현대문학론 요점 요약 정리 13. 1950년대의 문예계 비판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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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950년대의 문예계 비판운동

건국 직후 유연하고 온건했던 공산당의 정책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점차 정치적으로 경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주요한 이유는 내부적으로는 우선 식량과 생필품 부족이라는 경제적 난관이었습니다. 경제상황의 악화는 집권세력인 중국공산당에 대한 불만의 표출로 쉽사리 이어지기 쉬운 여건을 조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외부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이 중국을 봉쇄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던 국제정세의 긴장이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이런 내외의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식량과 생필품에 대한 배급제를 전면 실시하여 물자 부족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였으며, 국민들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동원하여 공공사업에 투입하고자 하였습니다. 국민들의 생활을 국가가 권력을 동원하여 통제하는 이런 정책에 대해 상당히 많은 자유주의적 지식인과 문인들이 반발하자 중국공산당은 정치권력을 동원하여 그들이 신중국의 건설을 방해한다고 비판하고 숙청을 단행하였습니다. 1950년대 문예계 비판운동은 이런 정치적 배경 아래 간헐적으로 지속되었습니다.

 

1. 武訓傳 비판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진행된 <무훈전> 비판은 국민들에 대한 강한 통제를 지속하겠다는 중국공산당의 정책적 전환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문학예술의 차원에서 볼 때 자유주의적인 지식인과 문인, 공산당내 온건파 등이 요구하던 연안문예강화의 축소 해석 내지 폐지 여론에 대해 중국공산당이 연안문예강화의 중앙집권적 통제정책을 지속할 것을 천명한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건국 초기 중국인들은 물론 중국공산당 내부에서도 정치권력의 통제를 완화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오랫동안의 전시체제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민심을 위로하고 사람들이 생산 현장으로 돌아가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하자는 온건한 주장들이었던 셈입니다. 중국공산당 또한 내전 과정에서 중국인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耕者有田 원칙에 입각한 공평한 농가별 토지소유제를 약속했었습니다. 농민들은 집과 농토를 골고루 나누어주겠다는 공산당의 약속을 믿었고 사회주의적 신념보다는 자기 집과 땅을 소유하고 열심히 일한 소출로 잘 살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공산당의 약속을 믿고 사회주의혁명을 지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식량과 생필품 부족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지의 국유화를 추진하였고 사회주의적 소유구조와 사회체제의 확립이 시급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영화 <무훈전>은 이런 공산당의 입장과는 다른 세계관에 입각한 문학 작품이었습니다. <무훈전>은 선각자의 지도와 계몽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이 각성되며 교육을 통해 지식이 확산되면 사람들이 각기 자신들의 일을 열심히 수행하여 잘 살게 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영화였습니다. 말하자면 개인의 자발성이 국가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며 정치지도자가 아니라 각 지역과 부문에서 오랫동안 종사했던 경험이 풍부한 실무적 지도자들의 역할이 중요함을 주장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중국공산당의 좌파 강평세력은 이에 대해 즉각 비판을 가했습니다. <무훈전>이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고 있으며 잘 살고 못 사는 문제가 마치 개인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산당은 현재 중국의 어려운 상황은 잘 살고자 하는 개인의 이기적이고 파편화된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내외적 사회구조의 모순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체제의 구조적 변혁을 통해서만 해결이 가능한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자유주의적 문인들은 <무훈전>의 작자 孫瑜의 입장을 옹호하였으며 좌파 문인들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사실 이 논쟁은 현실과 역사를 어떻게 파악하고 인식하는가 하는 세계관의 문제이기 때문에 양쪽 다 옳고 또 각기 약점과 단점을 갖고 있는 문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논쟁은 춘추전국시대부터 또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시작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국가사회와 개인의 관계,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논쟁인 것이지요. 양자가 조화와 절충을 이루는 게 성숙한 사회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좌파 문인들은 중국공산당의 정치권력을 빌어서 우파 문인들을 숙청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사건은 중국 건국 이후 최초로 정치권력의 힘을 빌어 학술사상의 반대파를 숙청하는 나쁜 선례를 남긴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후 전개된 여러 비판운동을 통해 이런 선례는 점차 관습이 되어 갔습니다. 우파 문인과 지식인들은 이런 나쁜 정치적 관습에 대해 저항했지만 중국공산당의 강한 정치권력과 중국 인민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2. 紅樓夢 비판

<홍루몽>은 그 자체로서만 보면 자전적 소설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뛰어난 문학작품이 그러하듯이 <홍루몽> 또한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으며 현실주의는 물론 숙명론과 허무주의까지도 용해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인 사실을 왜곡하거나 악의적으로 어떤 특정한 어떤 관점을 배제한다면 문제겠지만 <홍루몽>처럼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명작에 대해서는 실상 다양한 관점의 서술이 당연히 가능한 일이겠지요. 따라서 어떤 관점에서 서술하는가 하는 문제는 온전히 비평가의 안목에 달린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1954년 한국전쟁 직후의 상황에서 <홍루몽>에 대한 공산당과 좌파 문인들의 관점은 이런 기본적인 원리를 무시할 만큼 경직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전적 관점에서 <홍루몽>을 연구한 자유주의적 성향의 학자 兪平伯에 대해 좌파 문인들은 그가 봉건사회의 실상을 냉철하게 묘사한 <홍루몽>의 현실주의적 문학정신을 고의로 무시하고 왜곡했다고 비판을 가했습니다. 그들의 비판은 좌익적 관점은 모든 다른 관점들보다 상위에 있는 일종의 대전제라는 신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중국공산당의 강력한 정치권력에 힘입어 강제적으로 관철되었습니다. 당시 국가주석 毛澤東은 직접 이 비판운동에 개입하여 좌파 문인들을 지원하였습니다. 정치권력이 개입한 비판운동의 결과 중국 문단에서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중도파 중진문인들은 강제로 축출 당하였으며 대신 좌파적 신념으로 무장한 젊은 문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일종의 강제적인 세대교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3. 胡風 비판

이전까지의 비판운동이 대체로 공산당에 대해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은 반대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胡風 비판은 공산당 내부의 우파적 세력을 권력으로부터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胡風魯迅의 뒤를 이은 민족주의적 좌익 문인의 대표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좌익이기는 하지만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중도적이고 온건한 공산당원들을 대표하는 즉 좌익 가운데 비교적 우파적 성향을 포용하는 공산당으로서 공산당내 우파라고 할 것입니다. 毛澤東을 구심점으로 한 당내 좌파는 호풍을 거세게 비판하여 그를 반혁명분자로 체포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25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胡風은 당내 우파인 鄧小平이 권력을 장악하여 개혁개방과 사상해방 정책이 시행된 뒤 1980년에야 석방되어 명예를 회복했지만 이미 노년의 나이였습니다.

 

4. 雙百방침과 반우파투쟁

1956년 쌍백방침이 제기된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알려지지 않은 일이 많습니다. 쌍백방침은 지나친 정치적 강경책과 반대파 탄압 숙청으로 인해 중국인들의 공산당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인 데서부터 점차 두려워하는 쪽으로 바뀌고 거듭된 비판가 숙청으로 인해 국민의 지지가 점차 약해지고 있던 상황을 타개하고자 제기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산당 외부의 인사들은 물론 당내에서도 비판과 숙청을 두려워해서 아무도 적극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상황으로 인해 당과 정부 조직은 활력을 잃었고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정치권력의 상층부만을 바라보는 상황은 전 부분에 걸쳐 국가적 침체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쌍백방침은 어느 정도 반대파를 제거했고 또 국가발전 방안에 대해 나름대로 국민적 계몽과 교육을 진행했다고 믿었던 중국공산당은 허심탄회한 토론과 논쟁을 통해 공산당 지도부의 국가발전 전략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사람들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쌍백방침이 공표되었어도 1950년대 초반과 중반의 비판운동 과정을 체험했던 문인과 지식인들은 아무도 나서서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공산당은 이제는 결코 더 이상 비판운동을 전개하지 않겠다고 거듭거듭 약속했고 그 약속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차츰차츰 일부 젊은 문인들이 중국공산당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조심스럽게 발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좌파와 우파 사이에 다시 논쟁이 시작되었으며 이번에는 중국공산당이 개입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 결과 논쟁은 상당히 공정하게 진행되어 좌파와 우파 사이에 다양한 논쟁들이 이어졌고 젊은 문인들은 중국공산당의 비합리적인 정책과 독재적인 정치적 의도를 비판하였습니다.

중국공산당이 비판적인 문인과 지식인들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일부러 침묵을 지켰는지 아니면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상황이 악화되어 개입을 결정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중국공산당은 논쟁에서 좌파가 우파에게 계속 밀리고 국민 여론이 우파 쪽으로 기울자 다시 칼을 빼어들고 논쟁에 개입하였습니다. 논쟁 과정에서 공산당을 적극적으로 비판했던 젊은 지식인과 문인들은 대거 숙청당하여 강제노동, 벽지 추방, 투옥 등의 방식으로 숙청당하였습니다. 이 과정을 가리켜 반우파투쟁이라고 부릅니다. 반우파투쟁 이후 당내 좌파들은 일방적으로 대약진운동이라는 과격한 극좌적 국민동원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정치권력을 잡고 있던 毛澤東을 구심점으로 한 좌파들은 이후 다시는 우파와의 허심탄회한 논쟁이나 토론을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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