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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현대문학론

중문학과, 중국사, 방통대 등 중국현대문학론 요점 요약 정리 2. 새로운 시대와 문학의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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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새로운 시대와 문학의 각성

두 번째 강좌는 중국 현대문학이 1910년대 후반 출발하기에 앞서 어떤 역사적 과정이 있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중국 현대문학은 작게 보아서는 陳獨秀, 胡適, 魯迅과 같은 선각자들의 노력에 의해 비롯되었지만 크게 보면 阿片戰爭 이래 축적되어 온 변혁의 움직임이 20세기 초에 와서 비로소 결실을 맺었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인들에게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준 아편전쟁은 전통적인 질서를 개혁해야 한다는 근대적 지식인과 애국적인 운동가들의 주장에 무게를 실어 주었던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아편전쟁의 충격으로 인해 청 왕조, 기득권 사대부계층, 근대적 지식인, 저항적인 서민계층 등은 각기 상이한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강좌에서는 70여 년에 걸쳐 축적되었던 현대문학의 태동이라고 할 수 있는 움직임들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축적되어 왔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1. 현대문학 등장의 역사적 배경

2. 자강운동과 중체서용론

(두 작은 주제들을 편의상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중국 현대문학 연구자들은 1840년 영국 해병대에게 중국 군대가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아편전쟁을 중국 전통문학의 뿌리가 흔들리고 20세기 초에 현대문학으로 발전하게 되는 새로운 문학을 향한 움직임이 태동하기 시작한 사건으로 봅니다. 중국은 1942南京條約을 통해 패배를 시인하고 막대한 배상금의 지급, 중국 영토 사용 권한 승인, 자유무역 체제 용인, 자원 양도, 서구인에 대한 치외법권 인정 등 무조건 항복이나 다름없는 수치스런 불평등 조약에 합의했습니다. 이처럼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해 온 중국인들의 국가적, 문화적 나아가 민족적 자부심이 충격적인 군사적 패배로 인해 뿌리부터 흔들림에 따라 전통 질서를 변혁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수면 위로 부상했습니다.

그러나 변혁의 방향과 정도는 정파 혹은 계층에 따라, 또 개인에 따라 달랐습니다. 크게 보아 청 왕조와 기득권 사대부계층은 중국의 패배가 정치체제나 사회경제 시스템의 문제점 때문이 아니라 군사력과 과학기술의 열세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막대한 자금을 들여 서구 열강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하고 수치스럽기는 했지만 유학생들을 서구로 보내 필요한 과학기술을 배워오게 했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말하자면 국가 발전 전략은 中體西用의 논리, 그에 바탕을 둔 洋務運動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무운동은 다른 이름으로 自强運動이라고도 합니다. 나중에 淸日戰爭에서 다시 한 번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자 그들의 논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變法維新으로 발전했습니다.

반면에 아편전쟁의 과정에서 또 그 결과로 인해 황폐해진 중국 대륙에서 극도의 생활고와 무질서, 폭력에 희생되었던 서민들은 무능하고 무기력한 청 왕조에 대해 반기를 들었으며, 기존의 체제를 대신할 새로운 체제 혹은 새로운 왕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들의 희망과 기대에 부응했던 움직임이 太平天國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태평천국을 주도했던 洪秀全을 비롯한 사람들은 道敎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유교와 불교가 지배계층의 종교였던 데에 반해 도교는 중국 역사를 통해 서민들의 종교였으며, 왕조가 서민들을 도탄에 몰아넣을 때 왕왕 서민들의 편에 서서 반란을 일으키거나 심지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해 왔습니다. 청 왕조는 서민들의 절대적 지지 아래 남부 중국 일대를 석권한 태평천국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청 왕조를 대신하여 태평천국을 잔인하게 진압한 세력은 야심적인 지방의 토호들과 영국, 프랑스의 군대였습니다. 여러 면에서 우리나라의 東學과 비슷했던 태평천국은 서민들의 절대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사대부들의 세력과 서구 열강의 근대식 무기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태평천국은 이후 義和團, 辛亥革命, 五四運動으로 이어지는 근대적 변혁의 물꼬를 텄다고 할 것입니다.

의화단과 신해혁명을 거쳐 확산된 근대적 개혁의 움직임은 점차 중국인들 사이에서 저변을 넓혀 나가다가 1910년대 후반에 이르러 드디어 五四運動이라고 부르는 일대 국민적 변혁운동을 통해 결실을 맺게 됩니다. 1910년대 후반에 들어와 현대문학이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작게 보면 중국의 변혁적인 문인과 지식인들의 꾸준한 노력이 축적된 결과이지만 크게 보면 아편전쟁으로부터 비롯된 역사의 변혁을 지향하는 에너지가 오사운동에 이르러 결실을 맺게 됨에 따라 가능해진 일입니다.

 

3. 서구의 사상과 문학의 도입

아편전쟁과 태평천국 이후에도 청 왕조와 사대부계층은 중국의 몰락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조만간 강대국으로 복귀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청일전쟁의 충격적 패배는 중체서용론적 신념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서구 문물을 접했던 일부 사대부들은 서구 열강을 본보기로 하여 중국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몰락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품기 시작하였습니다. 嚴復林紓가 그 전형적인 경우였습니다. 嚴復은 서구의 학술 사상을 도입하여 중국을 근대화해야 한다는 생각 아래 서구의 학술서, 사상서를 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헉슬리의 사회진화론, 아담스미스의 경제학설, 밀과 몽테스키외의 정치사상 번역은 중국이 처한 시대적 위기를 일깨워 주어 근대적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林紓는 서구 문학 작품을 주로 번역하여 현대문학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번역의 수준에 있어서는 嚴復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지만 당시 대중적 영향력, 특히 청소년들에게 서구 문물을 소개하는 데에 있어서는 林紓의 번역이 훨씬 더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4. 梁啓超의 공리주의 문학론

19세기 말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정치사상과 문학 분야에서 梁啓超의 역할은 매우 독특합니다. 梁啓超의 혁신 사상은 기본적으로 중체서용론의 발전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태평천국으로부터 시작하여 발달해 온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었던 근대적 지식인들의 변혁 논리도 수용하고 있습니다. 문학 분야에서 상당히 의미가 깊은 梁啓超의 공리주의 문학론은 보수적인 측면과 함께 陳獨秀, 胡適, 魯迅으로 이어지는 개혁적인 문학적 논리의 요소도 아울러 구비하고 있습니다. 개혁적인 요소의 핵심은 문학 변혁의 목표가 사대부계층이 주도해 왔던 전통문학 내부의 변혁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서 이제까지 진지한 문학의 독자로 인정되지 않았던 서민계층을 독자로 설정하고 그들을 계몽하고자 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일본의 근대문학을 통해 그가 착안하였던 바로 이 국민 계몽이라는 생각은 그 동안의 문학 변혁의 논리들이 중국 현대문학으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했다고 하겠습니다. 이 점 때문에 교재에서도 梁啓超의 문학론에 대해 특별히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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