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현대문학론

중문학과, 중국사, 방통대 등 중국현대문학론 요점 요약 정리 6. 문학혁명에서 혁명문학으로

728x90
반응형

6: 문학혁명에서 혁명문학으로

오사운동을 향해 변혁의 열기가 무르익어가던 1910년대에는 민족운동, 근대화운동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중국의 변혁세력이 한데 뭉쳤습니다. 오사운동 직후에도 좌우의 세력을 대표하는 손문과 진독수는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고 한데 뭉쳐 중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해 협력했습니다. 그들은 수구세력과 매판세력을 타파하고 중국의 근대화를 이루자는 열정적인 애국적 목표를 공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사운동 이후 몇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근대화를 위해 한데 뭉쳤던 세력들은 앞으로 중국이 어떤 나라로 발전해야 하는가를 놓고 점차 논쟁을 벌이고 비판과 비난을 주고받으면서 분리, 분열되어 나갔습니다. 혁명문학의 등장은 바로 이와 같은 미래의 전망을 둘러싼 지식인과 문인들의 대립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1. 혁명문학 등장의 배경

1920년대 후반 혁명문학이 등장하는 배경에 대한 설명은 문학적 상황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설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혁명문학 그 자체가 정치운동의 일부로서 대두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문학이란 정치와는 구별되어야 하며 정치적 생각을 문학을 통해 표현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에는 물론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학과 정치를 연관시켜 생각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문학과 정치를 밀접하게 연관시켜 생각한 1920년대와 1930년대 좌익 문인들의 생각도 나름대로의 역사적 배경과 합리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중국 현대문학은 출발부터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우회적이기는 했지만 노신은 반봉건이라는 주제를 열정적으로 다루었으며 그의 생각은 민족주의적 국민 계몽이라는 가치, 말하자면 문학을 포함하지만 문학의 범주를 뛰어넘은 보다 큰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노신이 나중에 현실 정치에 개입하고 그 결과 그의 인생의 후반기를 지명수배 상태의 지하생활로 보내게 된 것은 그의 문학에 대한 생각이 이른바 순수문학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노신은 당시의 정치적 현실에 대해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필치를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노신의 문학에 대한 생각이 정치와 연관되어 있었고 그래서 순수하지 않았다고 해서 문제를 삼지는 않습니다.

1927년 장개석의 4.12쿠데타 이후 좌익문인들이 혁명문학의 기치를 내걸고 전투적인 태도로 글을 쓰고 문학 활동에 임한 것은 시대상황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나름대로 애국적인 이유를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 20대였던 젊은 좌익문인들은 중국대륙의 사회주의화를 위해 열정적으로 글을 썼으며 우익 문인들과의 논쟁에 나섰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대부분 일본과 러시아 좌익문인들의 주장을 각색한 것이었고 내적 긴밀성과 완성도가 매우 낮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1930년대 이후 좌익문인들의 활동에 초석이 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내용이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재에서는 혁명문학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상당히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만약 국민당이 중국대륙의 패권을 장악하고 사회주의 세력을 축출하는 데에 성공했다면 혁명문학을 주장했던 문인들에 대한 서술은 매우 부분적으로 밖에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대륙에 사회주의 정치권력이 들어섰고 장개석과 국민당은 대만으로 쫓겨나 미국의 보호 아래 간신히 연명하게 된 것이 나중의 역사이고 오늘날의 현실을 이루고 있습니다. 역사 서술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항상 오늘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과거에서 찾는 것이지요.

서론이 너무 길어졌는데, 학생들이 자주 하는 질문에 대해 이 기회를 빌려 답을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집필자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던, 또 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던 오늘날의 현실을 구성하는 중요한 과거의 사실에 대해서는 자세한 서술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겠지요. 반면에 사건이 일어나던 과거 당시에는 대단한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사건의 주역들이 이후의 역사에서 그다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면 그 사건은 작게 서술될 수밖에 없는 일일 것입니다.

 

2. 창조사와 태양사의 혁명문학론

혁명문학론은 창조사와 태양사라는 두 문학사단에 의해 주로 제기되었는데, 먼저 혁명문학의 기치를 내건 쪽은 창조사였던 것 같습니다. 원래 창조사는 일본유학생 출신의 젊은 문인들이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주장하면서 낭만주의를 내걸고 결성되었던 문학사단이었는데, 나중에 일본에서 공부한 프롤레타리아문학(프로문학)으로 기치를 바꾸어 걸면서 새로운 활동의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을 억압하는 중국적 현실을 철저하게 개혁하려면 사회주의로 중국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건 것이지요. 그들은 개인의 자유로운 정신과 인간적인 사고를 틀어막고 있는 구시대적 문화와 문학을 일소할 것을 주장했고, 노신과 주작인이 주도하고 있는 온건개혁 노선의 문학 활동을 비판했습니다.

또 다른 혁명문학의 진원지는 태양사였습니다. 주로 러시아 유학생들과 공산당원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했던 태양사는 창조사보다도 더욱 선명하고 이론적으로 앞서가는 면모를 보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이론과 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돌아왔던 장광자는 이론과 작품 양면에서 한 발 앞서가는 면모를 과시하였습니다.

 

3. 혁명문학론을 둘러싼 논쟁

혁명문학론을 제기한 문인들은 성격상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우익 문인들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좌익 문인들은 일본과 소련으로부터 수입한 좌익 문학이론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한편 장개석과 국민당의 지원을 받은 우익 문인들의 부도덕성을 집중 공격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두 진영의 논쟁은 허심탄회한 이론적 논쟁에 머물지 않고 격렬한 정치적 논쟁으로 이어지기 쉬웠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신공격을 수반하는 언사가 난무하기 일쑤였습니다. 문단의 원로와 중진들도 모두다 혁명문학론을 내건 좌익문인들로부터 격렬한 비판과 비난을 받았으며 중국 문단은 이 때문에 감정 대립과 분열적인 분파주의로 물들기까지 했습니다.

혁명문학론으로 인한 문단의 대립과 분열은 중국공산당의 개입에 의해 해소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은 오늘날 명료하게 정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워낙 대립되는 견해들이 속출하고 반대되는 의견들이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에 객관적인 사실이 어떠했는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서 여러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중국공산당은 좌우 문인과 지식인들의 대립 상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정치적 판단을 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그런 정치적 판단에 입각하여 중국공산당의 통제권 아래 있던 태양사와 창조사의 구성원들에게 지나친 지식인 내부의 대립보다는 적당한 협력 체제의 구축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피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창조사와 태양사의 문인들이 중국공산당의 권고를 받아들여 혁명문학론을 적당한 형태로 완화시키고 중도적인 문인들과 양심적인 민족주의적 문인들의 입지를 인정하는 선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가다듬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