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귀금속디자인

보석가공 및 보석세공의 A to Z 귀금속 디자인 요점 정리 28. 서양 장신구사 4

728x90
반응형

28. 서양 장신구사 4

 

바. 바로크
17세기 초 유럽 궁전에서는 스페인의 영향력이 기울고 프랑스가 패션의 선도자로서
전면에 등장했다. 이 시대의 장신구에는 진주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짧은 기간이기는 해
도 실제로 진주는 다른 소재를 거의 완전히 대체해 버린 듯하다. 진주 장신구를 풍성하
게 착용할수록 유행의 첨단에 서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조각상에 에나멜을 입힌 이전의
세팅과 달리 보석을 추상적으로 균형 있게 무리지어 배치하는 식으로 장신구의 강조점
도 전환되었다. 식물문양은 여전히 선호되었는데 이는 새로운 에나멜 기법의 등장과도
관련이 있다. 인도산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루비의 수입이 증대되면서 보석 본래의 가
치를 살리는 장신구 제작이 가능해졌고, 다이아몬드 커팅 기술의 발전은 장신구 디자인
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7세기 후반에는 다이아몬드 구입이 쉬워지자 다이아몬드 사용이 눈에 띄게 증가한
다. 이 시기에 크라운 33면 퍼빌리언, 25면인 브릴리언트 컷(brilliant-cut)이 처음으
로 선을 보였다. 17세기 끝날 무렵에는 다이아몬드의 광채를 더욱 살리기 위해 뒷면에
박을 댔고, 크기가 커 보이고 무색투명함이 강조되도록 금보다는 은에 세팅하는 것이 일
반적이었다.

십자가 펜던트 (프랑스)
은도금된 초상화기념 (영국)

 

고기형 펜던트 (이태리)
팬던트형 귀고리 (이태리)

바로크 장신구에서 가장 인기를 끌던 모티프는 나비매듭형(bow)인데, 아마 장신구를
고정하기 위해 묶던 리본에서 발전된 듯하다.
특히 17세기 중반의 초상화에서는 나비매듭형 펜던트, 브로치, 귀고리가 단연 눈에 띈
다. 이러한 장신구는 대개 앞면을 테이블 컷과 로즈 컷 보석으로 뒷면을 에나멜로 장식했다.


사. 로코코
1730년대에 등장하여, 전 유럽의 장식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로코코의 비대칭형은
1780년대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린 우아하고 유려한 꽃, 깃, 잎새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이아몬드는 대부분 무색투명한 원석을 그대로 사용했으나 유색의 금속 박을 입
힐 때도 많았다. 그 부드러운 파스텔 색조는 당시의 낭만적 자연주의에 더할 나위 없이
잘 부합되었다. 준보석은 낮에 착용하는 장신구에 주로 사용되었다. 18세기의 인기품목
은 가넷(garnet=석류석)을 얇게 커팅하여 박을 씌운 다운 금에 세팅한 것인데, 특히
1750년대와 1760년대의 꽃과 리본 디자인에서 최고의 멋을 발한 듯하다.

물방울형 브로치 (영국)
로코코 스타일 브로치 (러시아)
장식촛대귀고리 (스페인)
브로치 (영국)

아. 제국주의시대
1789년 대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에서는 장신구의 제작이나 착용이 일순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군주와 궁정을 상징한다 할 장신구의 운명은 극적인
반전을 겪게 된 것이다. 1804년 나폴레옹이 제정을 선포하면서 파리의 호화사치 산업,
특히 보석 산업의 경기가 되살아났다. 브라질이 다이아몬드의 주요 산지이고, 암스테르
담이 다이아몬드 커팅의 중심지임은 이 시기에도 변함이 없었다. 커팅법으로는 브릴리
언트 컷이 가장 선호되었으며 로즈 컷은 그 다음이었다. 다이아몬드는 은에 세팅했는데
변색으로 인한 피부탈색을 막기 위해 안쪽에 금을 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반면에 유
색보석은 금에 세팅했다. 나폴레옹은 1804년 대관식 왕관을 장식하는데 카메오를 선택
했고, 이듬해에는 프랑스 보석엔그레이빙학교를 설립했다.
나폴레옹이 특별한 관심을 보인 이유는 엔그레이빙한 보석이 고대 그리스 로마 제국과
의 연계성을 확실히 대변해 주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 일가는 다이아몬드와 카메오를
함께 세팅하거나 에나멜을 입힌 금틀에 카메오를 세팅한 장신구를 즐겨 착용했다. 1814
년에 들어선 부르봉왕가의 왕정복기에는 긴축정책을 폈던 시기로 다이아몬드를 수입할
여력은 누구에게도 없었고, 왕실세공품조차 정교하지만 얄팍한 금 마운드에 준보석을
세팅하는 식으로 적정가격대에서 최대효과를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865년경 이
후에는 커다란 솥, 물뿌리개 같은 유머러스하고 기발한 장신구가 큰 인기를 끌었다. 영
국에서는 자사의 새로운 장식문양이나 기술을 다른 회사에서 복제하지 못하도록 권리를 보호해 주는 저작권법이 1842년에 도입되었다. 디자인은 특허청에 등록되었고 회사명
칭과 등록일자를 기호로 표시한 마름모꼴 마크를 제품마다 찍었다.

활형 브로치와 물방울형 (스페인)
목걸이와 펜던트 (이태리)

19세기 중반까지 미국은 장신구에 비교적 무관심한 편이었다. 대부분의 장신구는 유
럽에서 수입해오는 실정이었다.
1837년에 설립된 뉴욕의 티파니(당시의 상호는 Tiffany & Young)도 처음에는 수입
품만을 판매했다. 직접 금 장신구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848년경부터인데, 티파니는
당시 불안정한 정치상황 때문에 다이아몬드 가격이 하락한 파리에서 다이아몬드를 대량
으로 구입함으로써 급격히 부상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