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학과, 방송대, 방통대, 문화 등 현대의 서양문화 요점정리 4. 서구와 이슬람 사회
제4장 서구와 이슬람 사회
1. 들어가며
서구와 이슬람 세계는 이슬람이 완성된 이후 지난 1,400년 동안 협력과 갈등을 거듭하는 애증의 관계였다.
특히 근대 이후 18새기부터 일반적으로 서구의 이슬람 세계 식민지화가 가속화되면서 ‘지배와 피지배’라는 숙명적 적대관계로 출발했다. 711년 아랍군의 지브롤터 해협 횡단 이후 오랜 기간 이슬람 세계의 직접지배와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려 온 서구로서는 18세기 이후 모처럼 뒤바뀐 힘의 강약구도를 깨뜨릴 의사가 전혀 없었다.
서구의 ‘이슬람 편견’은 오늘날까지도 크게 바뀌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다.
* 9·11 테러 : 2001년 미국 뉴욕의 무역센터와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을 붕괴시켰던 사건으로 서구에서 이슬람의
위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문명충돌론’ 이론이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이었다.
-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 9·11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알 카에다를 비호해 주었다는 이유. 급진 이슬람정권인 탈레반군과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 이라크 전쟁 : 2003년 대량살상무기와 역시 9·11테러 연계를 앞세우며 미국 중심의 다국적군에 의한 전쟁
* 2011년부터 시작된 아랍민주화 시위 : 이슬람식 민주주의가 새롭게 부각되고 급진적 이슬람 정치 세력이 퇴조.
이슬람 세계의 주류적 흐름은 서구와의 오랜 역사가 증명하듯이, 서구와의 대결과 갈등보다는 협력하고 공존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절대다수 이슬람 국가들이 서구와 정치적·경제적 협력 체제를
함께 구축하면서 글로벌 평화와 발전의 중요한 한 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 문명 간 대화 이론 : 이란의 전 대통령이자 철학자인 모하메드 하타미가 그의 책 문명의 대화에서 설파.
1999년 유엔총회 연설 이후 2000년을 유엔이 전한 문명 간 대화의 해로 선포하게 만들었다.
- 현재는 많은 수의 무슬림들이 서구사회의 당당한 시민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유럽에만 약 2,000만 명
이상의 무슬림이 거주하고 있고, 미국에도 800만 명가량의 무슬림이 1,500개 이상의 모스크를 짓고 서구 사회 내에서 분명한 자신들의 종교적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2. 서구와 이슬람 세계의 접촉과 역사
(1)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지배
* 우마이야 왕조 : 7세기 말에 아랍어를 공용어로 하고 아랍 통화를 제정하였다.
8세기 초에는 동쪽으로는 파미르 고원까지 진출하여 중국과 접하였으며,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 를 정복하고, 711년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하여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다. 이베리아 반도의
오늘날 에스파냐 땅은 이후 1492년까지 800년 가까이 이슬람 세계에 속하면서 중세 최고 수준의 학문, 과학, 예술, 문화 등의 결실을 유럽에 전해 주는 지적 창구 역할을 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서아시아, 아프리카, 남유럽의 3개 대륙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9세기 말에는 튀니지로부터 시칠리아 섬을 공격하여 200년 이상 이슬람 세계의 지배하에 두었다.
(2)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세계
* 오리엔트 전선 : 아랍군은 7세기 말부터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까지 진격했다.
1071년 셀주크 튀르크가 비잔틴 영역인 아나톨리아 영토로 진격하면서 이슬람 세계에 내주었다.
셀주크 튀르크를 이어 등장한 오스만 제국에 의해 후일 비잔틴 제국이 멸망당하는 전주곡이 되었다.
* 오스만 제국 : 첫 건설자인 오스만 베이는 월내 셀주크 튀르크 시대의 한 부족장이었다.
1299년부터 시작된 오스만 베이의 정복사업은 그의 아들 오르한 시대에 이미 유럽의 발칸 반도에 진출하여 비잔틴의 존재를 위협하였다.
1453년 술탄 메흐메드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뒤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꾸었다.
영토는 북으로 헝가리에서 남러시아, 남으로는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 걸프 해까지 이르러,
과거 이슬람세력권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오스만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중세가 종식되고 근대가 시작되는 기점이 되었다. 유럽은 오스만 제국이라는 동방문화권과 직접 접촉함으로써
동방의 새로운 기운과 문명을 급속도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곧바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이 스스로 ‘지리상의 발견’이라 부른 대항해 시대가 도래 하게 되었다.
(3) 이슬람 세계의 쇠퇴와 서구의 회복
16세기 중엽에 절정에 달한 오스만 제국은 17세기 들어 쇠퇴하기 시작했다.
- 내부요인 : 귀족 및 지방영주들의 세력이 커지고, 예니체리 군인들의 반란과 권력남용, 피정복지에서의 과중한
세금, 관료와 군부의 부패 등으로 사회적 혼란이 커졌기 때문
- 외부요인 : 유럽인들이 신항로를 발견하여 오스만 제국의 문자보급로에 타격을 입힌 것과 1571년 에스파냐와의 레판토 해전에서의 패배, 1683년 오스만의 비엔나 공략 실패 등을 들 수 있다.
* 19세기
-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계기로 유럽의 오스만 영토 잠식을 더욱 활발해졌다.
이집트 침략은 서구가 이슬람 세계를 본격적으로 지배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 그리스의 독립 선포
- 이집트의 총독인 무하마드 알리가 독립운동을 일으켜 오스만에 대항하며 이집트의 근대화를 추진시킨다.
이스마일 통치기에는 수에즈 운하를 완공하고, 산업·교통·교육의 혁신을 가져왔다.
하지만 지나친 재정지출은 경제를 파탄시켜 수에즈 운하의 실권이 영국으로 이관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결국 1882년 이집트는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 영국 : 예멘 아덴, 키프로스에 이어 이집트를 점령하고, 1890년에는 바레인과 쿠웨이트를 세력권에 넣는다.
- 프랑스 : 알제리 점령 이후 튀니지, 소말리아, 모로코를 연달아 침략하였다.
- 이때부터 서구에 의한 이슬람 세계 식민시대가 본격화되었다.
* 탄지마트 : 근대식 대개혁. 종교와 민족을 초월한 국민의 생명과 재산보호, 공개재판, 군현제도의 실시,
오스만은행 설립 등 정치개혁. 술탄 마무드 2세가 예니체리 군대를 해산하고 서양식 군대 창설.
* 메시루티예트 : 1876년에 공포된 신헌법. 제국 내 모든 시민의 동등한 권리, 내각 중심의 국정운영,
언론의 자유, 근대적인 조세 및 형벌제도 등을 명시.
하지만 러시라-터키 전쟁의 발발과 오스만 제국의 패배로 한계에 부딪혔다.
3. 20세기 이슬람과 서구의 갈등
(1) 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시작된 이슬람 세계와 서구의 현대적 갈등 : 반영(反英)에서 반미(反美)로
- 1947년11월29일 유엔총회장 : 미국의 집요한 제3세계 회유 작전으로 아랍과 유대 두 개의 독립국가로
분할하는 안이 통과되었다.
- 당시 인구비율에서 아랍인의 1/3을 차지하고, 전체 면적의 7%만을 소유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전역의 56%를 분할한다는 것이었다. 경작 가능한 대부분의 비옥한 땅은 이미 유대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 유엔표결 현장에 영국은 없었고 기권을 택했다. 이로 인해 아랍인들의 반영 투쟁은 반미로 바뀌었다.
- 사실 팔레스타인 분쟁과 삼중 약속을 통해 아랍인과 유대인의 갈등을 심어 놓은 것은 영국이었다.
-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팔레스타인이라는 한 지역에 아랍인에게는 아랍국가의 독립을(후세인-맥마흔
서한), 유대인에게는 유대 민족국가의 창설을 약속해주고(밸푸어 선언), 실상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미 자기들이 그곳을 점령하기로 합의(사이크스-피코 협정)했다는 사실이다.
- 상호 모순된 세 개의 비밀조약과 강대국의 비도덕적 정치음모가 바로 오늘날 중동 분쟁의 불씨를 가져온 본질 적인 핵심이다.
-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서구사회의 유대인 편들기와 팔레스타인 아랍인 추방과 박해는 서구와 이슬람 세계의
갈등관계에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2) 이스라엘 건국과 네 차례의 중동전쟁
아랍국가와 제3세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문명세계에 큰 충격을 던져 준 ‘데일 야신촌 학살사건’을 중심으로 가혹한 아랍인 추방을 단행하며 1948년 5월14일 이스라엘 국가를 세웠다.
아랍인의 심장부에 유대국가가 들어섬으로써 이슬람 세계와 서구사회가 화합하기 힘든 응어리를 갖게 되었다.
- 1차 중동전쟁(1948) : 당시 아랍세계의 맏형 격이었던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아랍국가들의 즉각적인 저항
- 2차 중동전쟁(1956) : 아랍민족주의를 표방한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의 지도 아래 전쟁이 벌어졌으나 모두 패배
- 3차 중동전쟁(1967) : 6일 전쟁. 기존의 아랍영토마저 이스라엘에 점령당했다. 가자지구, 요르단 강 서안.
골란 고원, 시나이 반도 등이 그곳이다.
- 4차 중동전쟁(1973) : 석유무기화 조치로 석유파동을 유발
- 1980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사건
- 1991년 걸프전쟁
- 인티파다 : 팔레스타인에서의 비무장 봉기.
※ 유엔은 아전보장이사회 결의를 통해 점령지의 즉각적인 반환을 여러 차례 촉구했지만, 그 결의안은 지금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국제법상 되돌려주어야 할 점령지 내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실효적 지배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
3. 이란과 서구의 불편한 관계
[1954년 모사데크 정권 붕괴 사건]
* 모사테크 : 스위스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엘리트 민족주의자로서 1951년 이란 수상이 되었다.
영국의 앵글로이라니안 석유회사의 횡포에 맞서 석유산업의 국유화 조치를 단행하고, 1952년 영국과 국교를 단절하면서 서방과의 불편한 관계를 감수하더라도 독자적인 노선을 주창하면서 석유이익을
이란에게 되돌리려는 정책적 시도를 하게 된다.
* 팔레비 : 친서구파 이란 왕. 모사테크를 해임함으로 국민들의 시위와 대립은 유혈충돌로 치닫는다.
결국 미국 정보당국이 개입하여 모사테크 정권을 무너뜨리고 친미적인 팔레비 왕정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때부터 1979년까지 팔레비 왕정은 철저한 친서방노선을 표방하면서 석유이익을 독점하고 이란국민들의 자유와 기본권을 억제하였다.
- 이 사건은 미국이 공공연하게 중동사태에 개입하는 뚜렷한 기점이 되었으며,
동시에 중동-이슬람 세계의 미국에 대한 불신이 더욱 가시화되는 정치적 계기가 되었다.
- 1979년 2월, 호메이니에 의한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왕정은 무너지고 이란은 오늘날 가장 강력한 반미, 반서구 국가가 되었다.
4. 걸프전쟁(1991년)과 알제리의 좌절
* 걸프전쟁 : 1990년 이라크 사담 후세인은 1980~1988년 사이 8년 동안이나 지속된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피폐 된 경제를 회복하고 민심을 얻기 위해 도발적으로 쿠웨이트 침공함으로 촉발됨.
이슬람 세계와 서구 사이에 또 다른 협력과 적대관계를 규정한 사건.
* 쿠웨이트 : 원래 오스만 시대부처 이라크의 바스라 주에 속한 이라크 영토였음에도 1932년 이라크가 영국으로부 터 독립할 때 석유 이권 때문에 영국이 계속 통치하고 있다가 1961년 이라크에 귀속되지 않고 독립 하였기 때문에 이라크는 그때부터 영유권을 주장해 오던 터였다.
- 1991년 1월 일부 걸프지역 아랍국가들과 함께 미국 중심의 서구세계는 다국적군을 편성하여 사담 후세인 공격을 감행하였고 42일 만에 끝남으로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철수했지만, 미국이 더욱 공개적이고 노골적으로 중동 문제에 개입하는 계기가 되어 반미-반서구 정서가 더욱 심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동시에 일부 아랍국가들이 다국적군에 가담하여 사담 후세인 공격에 동참함으로써 그나마 명목상으로 유지되던 아랍민족주의가 퇴조하고 아랍 22개 국가의 개별국가중심주의가 뚜렷이 부각되었다.
- 일부 걸프지역의 아랍 산유국 토후들은 아예 미국의 안보 우산 속에 들어갔고, 이집트와 시리아는 산유국들을
군사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대가로 상당한 재정적 혜택을 받았다.
- 이라크를 지지했던 예멘, 요르단, PLO 같은 일부 아랍국가들은 심각한 원조 중단 사태에 직면했으며, 걸프지역에 서 자국 노동자들이 축출당함으로써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한편 분할된 남북 예멘의 통합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 1991년 알제리 대통령 차들리에 의해 다당제 인정. 이슬람 정치세력 이슬람구국당(FIS)의 집권이 확실시 되자, 알제리 군부는 프랑스와 서구의 지지와 묵인으로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비상계엄 선포를 통해 이슬람구국당을 해체하고 야당인사들을 구금하였다.
이 사건은 국민들에 의한 새로운 민주주의 선거방식도 그것이 서구의 이익에 합치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폐기될 수 있다는 나쁜 선례를 안겨 주었다. 곧 이슬람 세계가 서구에 갖는 근원적인 불신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줌으로 써 서구와의 관계 개선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가 되었다.
(5) 오슬로 평화협정(1993년)과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의 실마리
* 오슬로 평화협정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국가 사이에 상호 불가침과 외교관계 수립 등을 통해 공존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스라엘의 점령지인 가자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지구에 팔레스타인
자치국가 설립이 가능해졌다. 분쟁과 갈등을 접고 화해와 공존으로 가는 중요한 선언이었다.
- 1995년 평화협정의 이스라엘 당사자인 이츠하크 라빈 수상이 암살당하고, 2001년 우파 리쿠드당의 샤론이 새로운 이스라엘 수상이 되면서 오슬로 평화협정의 골격은 훼손되었고, 분리장벽과 점령지 내에서의 유대인 정착촌 건설로 인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아랍인 사이의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4. 9·11테러와 서구의 이슬람 정책
* 9·11 테러 : 2001년 알 카에다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급진적 이슬람 정치조직들의 소행이지만 리비아, 이란 같은 반미국가는 물론 지하드, 하마스, 헤즈볼라 같은 과격 이슬람 단체들도 한결같이 테러를 비난했다.
하지만 이슬람 세계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미사일과 전투기를 동원한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공연한
민간인 학살도 국가 테러로 중지되거나 응징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당하면서 전쟁의 정당성은 온데간데 없고, 서구사회의 ‘이슬람 죽이기’라는 악몽이 재현되는 듯한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 2011년 초부터 튀니지에서 촉발되어 이슬람 세계 전역으로 급속하게 번지고 있는 민주화 시위도 이슬람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리비아 내전에 서구가 군사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이슬람 세계 와 서구사회의 갈등 양상이 변질되고 있다.
- 2011년 4월 9·11테러의 주범이었던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되고,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가 신중동정책을 발표하면 서 다시 이슬람세계와 서구가 화합하고 협력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5. 서구사회에 들어온 이슬람
(1) 유럽의 이슬람
- 유럽의 무슬림 인구는 2007년 통계로 약 5,3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이슬람은 유럽의 두 번째 종교가 되었다.
프랑스에 2010년 현재 470만 명, 독일 약 400만 명 이상, 영국 약 300만 명가량의 무슬림이 살고 있다.
- 무슬림이 서유럽에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로 이들은 주로 식민종주국의
용병들이었다. 알제리와 세네갈인은 프랑스군에서, 인도인은 영국군에서, 타타르인과 동유럽 무슬림은 독일군에 서, 모로코인은 에스파냐군에서 각각 해당 국가의 이익을 위해 근무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체제 가 무너지자 수많은 노동자와 유학생 및 기술연수생이 서유럽으로 진출했다.
- 1970년대 이후 이슬람 성원건립사업은 무슬림들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함께 오일달러로 부유해 진 일부 이슬람 국가의 정책적인 배려와 유럽 각 정부의 배려에 힘입어 서유럽 전체에 약 3,000개 정도가 개원 하였다. 이슬람 성원은 주로 대도시 중심부에 위치, 무슬림들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 1980년대 초에는 프랑스에 거주하는 북아프리카 출신의 무슬림보다 프랑스 현지에서 태어난 무슬림이 더 많아 졌다. 프랑스 태생 무슬림들은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이슬람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1세대보다 더 크다.
- 유럽인의 개종 : 1970년대 이래 수만 명의 유럽인이 정식으로 이슬람에 입문, 특히 기독교로부터의 이탈이라는 새로운 현상으로 유럽인 무슬림의 숫자가 꾸준히 늘고 있다.
- 수피운동 : 유럽인의 개종에 영향을 미치는 종파로, 자급자족으로 중세 초기의 묵가적인 생활양식을 지향하여
정통 이슬람보다는 신비주의라 일컬어진다. 수피운동의 극단적인 형태는 모로코에서 유래한 다르까위 형제단으로 이들의 국제본부는 영국 노르빅에 있다.
- 유럽 무슬림의 종파별 분포에 따르면 90%가 순니파에 속하고 10% 정도가 시아파에 속한다.
특히 영국에는 동아프리카에서 이주한 이스마일파 무슬림들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다.
1980년 아가칸 재단을 런던 심장부에 이슬람 성원을 건립하였다. 이곳은 이스마일파의 세계본부가 되었다.
- 1990년대 초반 유럽 이민자의 2/3가 무슬림이었다. 유럽 각 정부는 무슬림 이민자들에 대한 우려는 인구와
문화의 양면에 나타난다. 이슬람 공동체는 현지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조짐을 보여 주지 않아 유럽인들을 불안에 빠뜨리고 있다.
- 유럽 이슬람이 사회의 위협적인 종교로 간주되고 무슬림이 그 사회의 불편한 주변부에 머물러 있는 한, 유럽에 서 자라나고 공부한 무슬림 2세들의 좌절과 차별은 더 큰 사회문제로 유럽을 괴롭힐 것이다.
- 2001년 9·11테러 이후에 런던테러나 기타 유럽국가들에서의 테러 대부분이 외부의 소행이라기보다는 그곳에서 뿌리를 내린 자국민 무슬림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 차별과 소외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민자의 제한과 함께 자국 시민 무슬림에 대한 공정 한 기회와 사회적 통합 노력이 절실한 과제로 남는다.
(2) 미국의 이슬람
- 미국에는 600만 명의 무슬림과 1,500여 개의 이슬람 성원이 있다.
미국은 이슬람 전래 초기부터 이슬람 국가들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어 왔다.
이슬람 국가인 모로코는 미국의 독립을 제일 먼저 인정한 우방국이며, 1787년 모로코의 술탄은 미국과 평화우호 조약을 체결했고, 미국은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도 협력관계를 맺은 바 있다.
- 미국이 세계 초강대국이 되면서 미국의 지도자들은 아랍국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민간 부문, 즉 미국 석유회사들은 안정적인 석유 공급을 위해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미국이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 줌으로써 아랍에는 강한 반미감정과 함께 과격한 이슬람 국가가 생기게 되었다. 과격한 아랍국가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슬람의 종주국인 사우디의 위상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 1970년대 후반부터 워싱턴은 이슬람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주로 세계 석유 위기에서 비롯된
태도 변화였다.
- 9·11테러는 미국 사회 전반에 엄청난 충격과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슬람의 종교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바람직한 현상도 어느 때보다 고조되어 있지만, 반대로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관을 더욱 고착시키는 경향도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9·11테러를 일으킨 집단의 종교라는 심정적 적대감이 그것이다.
- 무슬림을 향한 한층 강화된 감시체제와 꼼짝달싹 할 수 없게 만드는 새로운 안보시스템 속에서 소수민족으로서 삶의 적응 전략을 선택해야 하는 무슬림들 :
① 학교에서 혹은 외출 시에 차도를 벗어 던지는 무슬림 여성이 늘어나는 추세이고,
② 급진적 이슬람 주의자들의 무모한 인명살상을 비판하는 쪽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③ 이라크전쟁을 둘러싼 반전평화운동에 누구보다 앞장서야 할 무슬림은 소극적인 방관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④ 9·11테러 이후 미국 무슬림 인구의 다수를 점하는 이민 2세 중심의 무슬림 젊은 전문가 집단에게 조국 미국 에 대한 충성과 미국적 이해관계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은 이제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어 벼렸다.
〈미국-이슬람 관계 자문기구를 중심으로 관계개선을 위한 조직적인 노력〉
첫째, 지역사회와 지방의회를 통해 무슬림의 존재를 떳떳이 알리는 동시에 이슬람의 올바른 성격과 미국사회에
대한 기여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둘째, 미국 내 이슬람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아랍-이스라엘 분쟁은 물론 이슬람권 분쟁에 대해
미국 행정부가 이중 잣대를 버리고 보다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다하로독 국내 정치적 로비와 유엔을 통한 압력을 강화하고
셋째, 이슬람권 이민정책에 대한 미국 당국의 문호개방을 촉구하며
넷째, 9·11테러 이후 급증하는 모스크에 대한 공격, 무슬림 자녀들에 대한 따돌림과 정신적 가해, 직장에서의
불이익을 철폐하기 위한 내부의 단결과 조직적·제도적인 안보 문제를 확보하고
마지막으로 이런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장기적인 포석으로 무슬림의 투표 참여율을 높이는 방안 등이
심도 있게 강구되고 있다.
※ 미국적 가치에 대한 애국적 입장과 이슬람 세계에 대한 종교적 연대감 사이에서 무슬림으로서 신앙과 종교적
가르침을 지속해야 하는 고통과 모순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노력이 오늘날 미국 무슬림의 현주소이다.
- 이슬람이 위험하고 위협적인 테러리스트의 요소를 갖고 있다고 잘못 해석하고 보려는 학자들과 정치부 기자들의 편견에 가득 찬 기사로 이슬람이 비민주주의로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 이렇게 편견과 무식을 바탕으로 이슬람을 그린 미국 언론의 지배적인 경향은 이슬람을 하나의 문화적 제도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외면한 잘못된 것이다.
6. 서구와 협력하는 현대 이슬람 세계
새로운 변화에 적합한 이슬람법의 적용과 개혁의 목소리도 점차 높아 가고 있다.
이제 아랍인을 비롯한 무슬림도 이슬람 일체주의와 아랍민족주의를 강조하며 서구에 대한 정치적 저항을 계속하는 한편, 전통적인 이슬람 규범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는 조화와 절충의 묘를 찾고 있다.
- 문명의 충돌에서 이슬람 세계와의 문명 대화로
중동은 인류가 처음으로 문명을 일구어 낸 땅이고, 다양한 이념이 함께하는 경험을 오랜 역사를 통해 축적해 간
공존의 현장이었다. 이슬람 세계와 서구의 관계에서 두 세계는 갈등 못지않게 조화와 공존의 지혜를 주고받았다.
* 칼톤 쿤 : 중동 인류학자. 중동을 ‘모자이크’사회로 표현하면서, 민족집단 간의 뚜렷한 노동가 직업의 분화, 다양 한 복장과 언어, 종교에 대한 관용, 이슬람을 통한 동질성의 확대 등에 의해 갈등과 반목보다는
이질적인 문화 자체의 존속과 다른 문화와의 대등한 조합을 강조하였다.
* 용광로 이론 : 전통적인 무슬림 사회학자들의 주창. 다양한 문화적 요소가 이슬람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용해되어 피아의 구분 없는 종합적인 문화토양으로서의 중동을 규정하고 있다.
* 바이어 : 서구인들이 무슬림들이 가진 증오의 씨앗을 뿌리는 데 어떤 역할을 하였다면, 그 증오의 씨앗을 제거하 는 데도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오늘날 서구는 지배적인 위치에 있다. 따라서 변화를 주도하기에는 서구가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 뿐만 아니라, 서구 자체의 보호를 이해서도 이러한 변화 시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 앞으로 서구와 이슬람 세계는 글로벌 시대의 공동주역으로 협력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슬람 세계의 각성과 함께 과거사에 대한 서구의 진지한 반성도 따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