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가공 및 보석세공의 A to Z 귀금속 디자인 요점 정리 21. 삼국시대 장신구사 5
21. 삼국시대 장신구사 5
나. 고려시대
(1) 시대적 배경
고려시대의 금속공예의 발달은 이 시대의 도예와 함께 한국 공예사상에 유례가 없는
풍요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이 금속공예품들은 범종, 반자, 향완, 정병, 요령, 사리기를
비롯한 불교 관계의 조도품과 호사스럽던 귀족사회의 생활을 반영하는 장신구, 동경, 주
자(注子), 식기류 등 일상용 그릇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불교 관계의 금속공예품은 그
기법의 세련이나 양식의 특색으로 보아 이 시대 금속공예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범종과 동제은입사로 된 향완, 정병류는 거의 고려 금속공예의 대표적인 예라
고 할 수 있을 만하다.
이밖에 고려의 금속공예는 이들 불교조도나 상류사회의 금·은기가 보이는 높은 격조
에 따를 만한 도자(刀子), 장신구 등 소품이 많고, 그 중에서도 금은세공으로 된 액세서
리는 당송의 금속공예를 능가할 만큼 좋은 솜씨를 보이고 있다.
(가) 옥지환(가락지)
고려시대의 지환은 그 종류가 많은데 그 중에 옥지환이 가장 많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
다. 옥지환은 한 쌍을 끼는 것이 그 당시의 풍습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런 풍습이 조선시
대까지 계승되었다.
옥가락지의 형태는 두툼한 것이 고려시대의 특징이며, 이 옥가락지의 직경이 1.2cm에
서 2cm까지 되는 것도 있었다. 환의 두께가 0.8cm 되는 것이 있으니 그의 두툼한 형태
를 알 수 있다.
이 옥가락지 재료의 종류는 다양하여 비취제, 즉 경옥을 최고로 생각하였고, 그 다음
으로는 마노제를 귀히 여겼으며, 그 다음으로는 수정 가락지였다. 이렇듯 옥지환 가운데
수정으로 만든 수정옥가락지도 귀하게 취급되었는데, 고려시대의 가락지는 신라와는 달
리 금세공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더욱 빈번한 외세의 침공으로 인해 많았던 유물이 거
의 흩어졌는데, 현재 옥지환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나) 장신금구
고려에서도 야금술이 매우 발달하여 금, 은, 동, 백동, 적동, 철 등으로 여러 가지 장신
구를 비롯한 부속품들이 장인들에 의하여 합금 또는 주조되었다. 특히 관과 대에 부속되
는 순금제를 비롯한 은, 동제의 금구가 많았는데, 대금구, 금지환, 금팔찌, 금장, 동경
등의 장신금구의 기술이 크게 두드러졌다. 특히 순금제의 장신구류 부속품들이 현재까
지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진홍섭 박사는 이 순금제 장신금구류를“대칭으로 쌍을 이루는 장신구인데 어디에 사
용되었던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무늬는 투각수법으로 동물, 식물의 각종 무늬를 새
겼는데 동물은 잉어, 원앙, 학, 거북 등이고, 식물은 매화, 난초 등 모두 길상(吉祥)을 뜻
하는 것들이다. 수법이 정교하나 중후한 기풍이 넘친다.”고 설명하였다
다. 조선시대
(1) 장신구 개요
신흥 조선왕조의 새 조직이 힘과 의욕으로써 이루어진 유교적인 새로운 사회지도체제
는 일반미술과 공예에 적지 않은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특히 국민의 생활 정서가 가
장 솔직하게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는 생활 미술, 즉 공예품의 미적 감각은 이러한 시대
배경에서 가장 민감하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대체로 조선시대 공예품에 나타난 이러한 감각은 한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자연
스럽고 본질적인 한국 풍토양식을 보인 것이었으며, 이것은 의식적이었거나 무의식적이
었거나 간에 한국 문화의 각 부분에서 독자적인 성격이 성숙되어 가는 하나의 좋은 예라
고 말할 수 있다.
한국장신구의 전통은 조선조시대에 이르러서 매우 다양한 전개를 보였다. 특히 조선조
시대의 여성 장신구는 잠류, 귀고리류, 노리개류, 지환류 등에 이르기까지 거의 독자적
인 민족양식이 정립되었으며, 따라서 그 다양하고도 풍부한 유품들이 많이 세전되어 있
다. 그러한 귀품 중에서도 그 고유한 양식과 세련된 제작기법으로 보아 한층 주의를 끄
는 것은 잠류와 노리개류이다.
조선조시대 여성의 쪽진 머리양식에서 오는 비녀류의 발달은 한국의 독보적인 격조와
양식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비녀양식의 다양한 발달을 촉진시킨 것은 영조 32년(1756)
왕명으로 사대부 집안 부녀자들의 가발을 금하고 족두리 쓰는 것을 권장한데서 비롯되
었다. 이것은 여성들의 가발 사치풍조를 억누르고자 한 의도였지만 쪽진 머리가 유행됨
에 따라 비녀류의 사치를 한층 불러일으키게 했다.
이러한 시대의 초기 비녀는 백동, 오동(烏銅)등의 재료로 단조롭고 길게 만든 것이 그
특색이었으나 점차로 금, 은, 보옥을 비녀의 재료로 사용하게 되었다.
비녀 재료 중에서 가장 많이 쓰여진 재료는 은이었는데, 특히 은비녀에 쪽빛 칠보의
농담을 가려 쓴 칠보잠류의 호협(豪俠)하고도 청초한 맛은 마치 백자에 청화그림을 그려
서 청아한 맛을 즐기던 조선조인들의 정취와 공통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은과 더불어 가장 많이 쓰인 보석류는 연옥(軟玉)이었다. 이 연옥은 은제의 칠보잠류와 더불
어 조선조 비녀의 쌍벽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 양식도 다양하고 수도 많았다.
이밖에 산호 가지를 그대로 은에 물러서 만든 산호잠과 은비녀의 머리를 호박으로 만
들어 장식한 호박잠이 있고, 또 물소뿔을 깎아 만든 흑각잠(黑角簪)과 대나무를 깎은 죽
잠(竹簪) 등이 있었으며, 황금은 그 수가 매우 적고 은도금은 비교적 많았던 것으로 보아
금비녀는 매우 절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형대로 세전된 예는 최근의 것이 대부분이다.
귀금속 아닌 것으로는 백동이 있으나 이것은 은의 대용품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재료나 의장을 가릴 것 없이 비녀 중에 크고 긴 것은 대개 시대가 앞인 것이 많고, 작
고 소박한 민잠일수록 19세기 후반 이후의 것이며, 금세기 초기의 것은 한층 간소한 의
장으로 짧게 만든 것이 그 특색이다. 이러한 변천은 물론 부인들의 머리형, 즉 쪽진 머리
의 크기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쪽진 머리를 고정시키기 위한 비녀와 더불어 성장 때 쪽진 머리에 꽂는 머리 뒤꽂이들
도 다양한 발달을 보였다. 특히 예장(橍裝) 때 쓰이는 머리꽂이류에는 보옥을 장식하고,
또 탄력 있는 용수철로 연결된 흔들리는 영락류를 장식한 예도 있다. 이상 비녀와 더불
어 한국여성의 전통적인 고유복식인 상하 의상에 조화시켜서 발달한 특이한 패식(佩飾)
장신구류를 통칭해서 노리개라고 부른다.
고래(古槏)로 한국에서는 금, 은, 보옥으로 된 여성용 장신구류를 일반적으로 패물이
라고 부른 예가 있었는데, 이것은 상의 위에 패용하는 노리개가 여성 장신구의 으뜸이었 던 데서 오는 관용어 이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조시대 후기에는 일부 서민사회에까지 보급되면서 의식 때의 예장뿐만 아
니라 평상복에서도 간략한 소삼작(小三作)노리개를 상의에 패용하는 것이 유행되었다.
노리개의 주체의장과 문양은 부귀다남(富貴多男), 수복강령(壽福康槑)을 상징한 서상
적인 물상과 문자, 그리고 벽사적(仲邪的)인 상징물과 여성의 정절을 상징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호랑이발톱은 벽사적인 것이며, 매죽문이나 장도는 정절을 뜻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들의 노리개는 비녀와 더불어 그들이 애중하는 재보이며, 따라
서 그 집안 가도와 부력에 따라 많은 수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노리개 또한 비녀와 함께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에게로 내려지는 세전지보였으며, 주
식과 종속부식물인 매듭과 술이 지니는 색감의 조화는 조선조 특유한 중간 색조에 특색
이 있으며, 이것은 노리개 전체의 조형구성에 나타는 순정적이고도 품위가 숭상된 조선
조 상류사회의 여성풍정을 반영한 것이다.
(2) 부인의 장신구
(가) 화관
영조·정조시대에 부인들의 가체문제(加察問題)가 일어났을 때 족두리와 함께 화관에
대한 문제도 일어났다. 정조 때 우의정이었던 체제공의 화관에 대한 기록이「번대암집
(樊大巖集)」에서 언급하였다. 그는 말하기를“연석(筵席)에서 화관을 금하지 말라는 하
교가 있었다. 화관은 이미 쓰고 있는 바이니 족두리를 버리고 화관을 만들어 쓰자는 논
의가 일어나고 있다.”하였다.
이 화관은 여혼(標婚) 때 쓰기 위해 만들었는데 이것을 부인의 머리에 쓰는 것은 사치
스러운 것이었다.
(나) 족두리
족두리(族頭里)는 궁중에서 의식이 있을 때 내명부들이 썼을 뿐만 아니라, 서민층에서
도 부녀들이 혼례식이 있을 때 원삼(圓衫)을 입고 머리에 썼다. 족두리는 앞이 화관보다
낮다.
족두리는 광해군시대의 중반기부터 널리 썼다. 검은 비단(玄錦)을 사용하여 거죽을 만
들고, 그 안에 자주 비단을 사용하였으며, 그 속을 비게 하여 여러 가지 장식을 한 후 머
리 위에 쓰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