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금속디자인

보석가공 및 보석세공의 A to Z 귀금속 디자인 요점 정리 20. 삼국시대 장신구사 4

magdaglia 2023. 8. 22.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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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삼국시대 장신구사 4

 

(8) 팔찌
(가) 백제
백제에서는 무령왕릉에서 팔찌가 출토되었는데 여기에서는 금제와 은제가 함께 출토
되었다.
① 무령왕비 은팔찌(武槑王妃 銀製釧)
이 팔찌[그림 2-49 참조]는 외경이 8cm로서, 팔찌에 명기가 있는 것으로는 백제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다. 이 팔찌는 순은으로 만들어졌으며 음각의 명기가 팔찌 뒷면에
기록되어 있다. 이 팔찌는 표면에 생동을 나타내기 위하여 용문(橛文)을 양각하였다. 용
문양을 양각한 탓으로 팔찌로서 지닌 독특한 신비사상이 스며있다.

무령왕비 은팔찌
사절은제팔찌

② 무령왕릉 사절은제팔찌
은으로 만든 팔찌 가운데 특이한 것으로, 일정한 길이로 자른 굵직한 은봉 4개의 중
간을 이어주는 고리에 연결하여 사절로 형성한 팔찌가 있다. 이 팔찌는 그 착장이 기발
하여 구절 또는 칠절목걸이와 흡사하다.[그림2-50참조]
(나) 신라
① 신라 팔찌의 특색
여러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팔찌, 은팔찌는 모두 일상생활에 끼던 것인데, 은팔찌는 많
이 끼었으나 금팔찌는 그다지 많이 끼지 않았다. 때로는 장의 때 종교적 사상의 영향으
로 시신에 끼우고, 그밖에는 함께 관 부근에 넣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팔찌에
한해선 금·은을 상용한 흔적이 많다.
신라인들은 북방 기마민족과 같이 흰색을 좋아하고 은팔찌를 좋아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복으로 소복을 좋아한 풍속도 이런 은팔찌를 좋아하는 요소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금·은팔찌의 세부
황남대총 금팔찌

②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엷은 금판의 위쪽과 아래쪽 끝을 각각 말아 올려서 만든 환에 다시 엷은 금판 한 장을
더 대고 그 표면에 누금세공으로 팔찌를 만들었다. 즉 말아 올린 모금판을 덧대어서 남
색옥과 청옥을 끼워 넣은 금관이 움직이지 못하게 끼우는 역할을 하였다. 둘레를 장방형
으로 8구분을 하여 누금세공으로 금립선을 이중으로 구획하고, 한 구는 삼각형 구분이
상대로 배치되고, 그 중앙에 4능각형의 청옥을 감입시키고 대삼각형이 없는 장방형의
구는 한가운데에 원형의 청옥을 감입시켰다. 이것 역시 누금세공이며 그 외에 화엽형좌
(花樿形座)를 무수히 표현하였다. 삼각형 구획이 있는 것이 4구획, 없는 것이 4구획으로
모두 8구획으로 형성되었으며, 무척 아름답고 이런 형태의 팔찌는 처음 출토된 것이다.

 

(9) 지환
(가) 고구려
지환(가락지)은 손가락에 끼우는 장신구로서 일본 남양 등지에서는 조개껍질을 잘라서 손
가락에 끼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예부터 지환은 금, 은, 동, 철 등의 금속으로 만들어졌다.
이집트에서는 반지를 호부용으로 쓰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동주 때부터 세환식 금제지
환이 사정(沙井)유적지에서 발굴되었다. 그리고 낙랑시대 한묘(漢墓)에서 부장품으로 은
제지환이 많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지환은 벽화나 발굴의 예를 문헌에서도 찾
아볼 수가 없다.
(나) 신라
① 지환의 형
가락지는 여자만의 전용물이 아니라 남자도 끼었다는 사실은 고분에서 출토될 때 피장
자가 남자라고 생각되는 유체(遺體)에서 많이 발견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판별하기는 힘든 일이다.
가락지를 끼는 습성은 신라시대에는 왼쪽 손가락에만 끼지 않고 오른쪽 손가락에도 낀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양쪽 손에서 반지가 열 개 발견된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왼손,
오른손의 구별 없이 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개 또는 두 개 정도 끼었
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는 수없이 발굴된 고분에서 출토될 때 두 개 또는 네 개에서부
터 10개까지 나왔으므로 쉽사리 추측할 수 있다.
② 노서동 금반지
특수한 의장으로 만들어진 이 반지는 상부면에 원형을 중심으로 네 개의 꽃잎을 세김
눈테(刻目紋帶)로 붙였으며, 반지 가장자리에도 같은 방법으로 세김눈테를 장식하였다.
상부면의 금체형(榨體形)은 능각형을 나타내어 신라시대(5∼6세기)의 금지환으로서는
가장 뛰어난 형과 솜씨를 나타낸 것이다.
경주 노서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것이며, 직경이 2cm나 된다.

노서동 금반지
감주식 금반지

③ 금령총 감주식(嵌珠飾) 금반지
순금제 6개, 은제 11개가 출토되었으나 은제는 모두 삭아서 그 형체만 남았고, 완전한
반지는 순금제 뿐이다. 손가락의 윗부분에 해당되는 곳을 넓게 하여 뾰족한 모서리를 만
들고, 거기에 마름모 형태로 세김눈테를 붙였다. 직경은 1cm내외이다.[그림2-54참조]
신라 상류층 사람들은 반지에서도 감주식 금지환을 만들어 끼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
이 아닐 수 없다.


(10) 과대와 요패
(가) 고구려
고구려에서는 유대(紐大)와 포대(布帶)가 처음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 예로 무용총·
주방에 나오는 여인들 허리를 보면 포(布)로 만든 띠를 왼편으로 묶었다. 더욱 무용총의
무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앞에서 춤추는 두 사람은 포대를 띠고 있고, 뒤에서 춤추는 두 사
람은 끈목 띠를 두르고 앞에서 끝맺음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통구 17호분 연도동벽의 수
문신장도(守門神將圖)를 보면 넓은 포대를 띠고 띠 끝을 활짝 편 것도 멋있다. 더욱 동구
사신총의 연도동벽에 역사상(樢士像)의 벽화를 보면 포대가 아니라 유대 같은 느낌이 든
다. 이렇듯 고구려인들은 끈목 또는 넓은 띠를 허리에 두르기도 했다.
(나) 백제
① 무령왕 은제과대(銀製
帶)
백제에서도 신라처럼 금제과대가 있었다고 생각되나 순금제가 출토된 일이 없다. 그러
나 은제과대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어 백제과대의 형태와 양식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은제과대
금제과대·요패

(다) 신라
① 과대의 과판
신라인들은 기마민족은 아니나 기마하는 풍습이 많은 민족이었다. 그러므로 옷을 입고
그 위에 과대를 착장해야 말을 타고 질주해도 옷이 흐트러지지 아니하고 활동하는 데 매
우 편리하였다. 이런 이유로 신라 사회에서는 왕조를 비롯하여 진골 또는 두품에 해당되
는 귀족들, 화랑, 모든 유품관원들까지 착대했는데, 자신의 신분에 따라 포대 또는 혁대
를 두르고 거기에 아름다운 혁금구(革榨具)를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신라 고분
의 발굴에 의하여 입증되었다.
금·은제의 과대는 모두 피장자의 허리 부분에서 출토되었다. 그런데 피장자의 허리
크기보다 다소 여유를 두었다 치더라도 과대의 길이가 너무 길다. 과판을 모두 이어보면
전체 길이가 108.2cm나 되는 것이 있다. 장례용의 의상을 몇 겹으로 입었다 하더라도
상당히 긴 것이다.
② 금관총 과대와 요패
금관총의 과대 및 요패는 국보 제88호로 지정되어 있다.[그림2-56참조]
과대는 그 길이가 109cm나 되며, 일종의 띠에 순금으로 장식한 과판이 달린 것이다.
이 띠는 포대 아니면 혁대의 표면에 방형의 순금과판을 39개 붙인 것이다. 이 과대는 매
우 정교하여 중국 육조시대의 영향을 받은 기법이라 하겠으나, 그 구조에 있어 신라의
독창적인 면이 많다.


(11) 옥류
(가) 백제
① 곡옥
곡옥의 시초에는 천하석제가 있다. 안산리 7호분에 한 개, 8호분에서 한 개, 반금리 1
호분에서 세 개가 출토되었다. 특히 공주군 이인면에서 반원형 곡옥이 출토되었는데 경
옥제이다.
그 당시의 곡옥류에는 무엇보다도 농녹색 또는 유백색에 녹반점(綠班點)이 있는 비취
(경옥)를 가장 좋아하고 귀중하게 여겼다.
(나) 신라
① 금령총 장식곡옥

금령총 출토의 곡옥은 맹수의 이빨이나 과일의 열매 등 자연물에서 모방한 것이 틀림
없으나 그 형태에 있어 흥미진진한 것이 많다. 경옥제의 곡옥인 만큼 신라의 고대인들은
행운을 초래하는 호부라고 믿어 그 형태에 있어 천편일률적인 것을 싫어하고 다양함을
좋아했다고 볼 수 있다. 형태에 있어서 큰 것이 있는가 하면 작은 것이 있고, 어떤 것은
올챙이 형상이 있는가 하면 물고기 새끼 같은 형상도 있다. 한결같이 곡옥의 머리 부분
에 변형을 일으키는가 하면 구부린 각도의 선, 형태가 가지가지이다. 또 어떤 형상은 성
난 물고기가 물 위로 솟구치는 형상도 만들었다. 이렇듯 신라인들은 자기 자신의 기호에
따라 가지가지 형태를 좋아했다.

금모곡옥(금령총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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